뉴저먼 시네마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에 걸쳐 독일에서 일어난 영화 운동으로 2차 세계대전 후 독일 영화는 침체에 허덕이고 있었는데 60년대 영화 산업 외부에서 활동하던 일련의 젊은 영화인들에 의해 독일 영화가 부흥된 것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오버하우젠 선언 이후 독일 정부는 1960년대 중반 영화학교를 설립하고 창작을 지원할 수 있는 다양한 정책을 제시하였으며 1960년대부터 베르너 헤어조크, 빔 벤더스, 알렉산더 클루게, 폴커 슐뢴도르프 등 일단의 재능 있는 감독들이 제각각의 개성과 세계 인식을 담은 영화를 만들어냈다.
뉴저먼 시네마와 오버하우젠 선언
독일은 1945년 2차 세계대전의 종결 이후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를 복구해야 했을 뿐 아니라 나치의 야만성이라는 극복해야 할 과거의 유산, 물리적 경계선을 두고 맞닿은 동유럽 공산 진영과 이념적 대립, 성장하는 자본주의가 야기하는 양가적 변화 속에서 1950년대 독일 영화계는 아직 자신을 갱신할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 시기 대표적인 독일의 영화 장르는 감상적인 방식으로 서술되는 향토영화였다. '오버하우젠 선언'은 이러한 기존 독일 영화계에 대한 반발이었다. 특히 프랑스를 중심으로 고조되고 있던 반전운동, 자본주의 비판 및 문화적 혁신의 움직임에 호응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뉴저먼 시네마의 전개
뉴저먼 시네마의 주요한 작가들은 막연한 고통의 문법이나 이상화된 낭만성을 거부했던 프랑스의 누벨바그, 브라질의 시네 노보, 영국의 프리 시네마 등이 이끌어 낸 문화적 혁신의 기운, 68혁명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반자본주의적이고 비판적인 정서 속에서 성장했다. 오버하우젠 선언은 정치적 모더니즘, 자유주의, 비판적 예술 정신을 요구했다. 오버하우젠 선언을 주창했던 일련의 감독 중 클루게와 라이츠 정도만 지속적으로 선언에 충실한 영화를 만들고, 자신들의 존재감을 알리는 데 성공했지만 같은 시기에 생산되고 배급된 대부분의 독일 영화는 여전히 관습적이었고, 독일의 국경을 넘어 소개되기에는 지나치게 강한 독일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뉴저먼 시네마 작가들의 생각
극영화와 기록영화의 스타일을 믹스해 관객이 자신의 두뇌 속에서 작품과 적극적인 대화를 구성하기를 바랐던 클루게의 영화들은 가장 먼저 오버하우젠 선언의 정신을 구현했다. 독일이 정치적 격변을 겪었던 1970년대는 뉴저먼 시네마가 가장 강렬한 에너지를 분출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뉴저먼 시네마를 이끌었던 영화인들은 이 영화를 제작하며 테러리즘과 정치적 보수주의 양자의 압박 속에 독일인의 삶이 무엇일 수 있는지, 시종일관 저항으로서 영화 형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했다.
뉴시네마
프랑스의 누벨바그 영향을 받아 1960년경부터 영국과 미국에서 발생한 새로운 경향의 영화운동을 말한다.
뉴시네마 운동은 실적 감각의 표현, 현장 중심의 촬영, 반체제적 주제로 영화계에 새바람을 불어넣기는 하였으나, 너무나 직선적 현실묘사로 관객으로부터 외면당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결국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치고 말았다. 미국의 뉴시네마는 반(反)할리우드 상업주의를 행동목표로 삼고 일어섰다. 영국의 경우에는 ‘성난 젊은이들’ 세대의 강한 반영이 주된 요소로 존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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