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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중국영화에 대해서

by 이슬샘 2024.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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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한국에서 ‘중국영화’라 하면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화를 뜻하기도 하고, 중국대륙, 홍콩, 타이완영화를 아우르는 개념, 즉 중국어 영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중국영화는 일찍부터 상하이를 중심으로 영화회사를 주축으로 산업화, 시장화를 이루었고, 이는 홍콩으로 이어졌다. 홍콩은 장르영화를 발전시켜 내수시장 장악은 물론 동남아, 미국 등지까지 진출하고 한국과도 일찍부터 합작을 시작했다.
반면 사회주의 중국의 영화는 정책의 강력한 통제와 관리를 받으며 운영되었고 지금까지도 완전한 시장화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타이완은 일제 치하에서 영화가 유입되어 제대로 시작조차 하지 못한 상태에서 미국영화의 영향력과 국민당 정부의 통제 속에 오랜 시간을 보냈다.

중국영화의 초창기(1905∼1949)

1896년 상하이에서 중국 최초로 영화가 상영되었고, 그로부터 9년 후 1905년 베이징에서 경극 공연을 담은 중국 최초의 영화 <정군산(定軍山)>이 만들어졌다. 중국영화 초창기에 영화 중심지는 상하이 였으며 1920년대부터 산업의 형태를 보였고, 1930년대부터 규모가 큰 영화회사가 등장했으며, 배급과 상영도 체계를 잡아갔다. 사실주의 영화, 반제국․반봉건을 표방하는 영화들과 더불어 무협영화와 사극영화 등 각종 장르영화도 등장했으며 영화회사를 중심으로,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 배우들이 활발하게 영화를 생산해 냈다. 

중화인민공화국 설립과 문화대혁명 (1950∼1976)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 이후 중국대륙의 영화 자원은 모두 국유화 되었고, 영화업은 사회주의 체제 속에 운영되었다. ‘17년 시기’로 불리는 1949년부터 1966년까지의 기간에 영화는 예술이나 산업이 아닌, 이데올로기 도구의 기능이 강조되었다. 대륙에서 유입된 인구로 인해 복잡해진 홍콩에서 영화는 각광을 받는 오락이었다. 영국령 자유무역항이라는 유리함을 한껏 발휘해 해외로도 한껏 뻗어가 ‘동방의 할리우드’로 불렸으며  한국과는 1957년부터 합작영화를 만들기 시작해 인력 등 다방면의 교류가 있었다. 

개혁 개방과 뉴웨이브의 등장(1977∼2000)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개혁 개방의 물결이 중국대륙에 일어났다. 1979년부터 홍콩에서는 1940년대 후반 태생으로 홍콩에서 성장해 외국에서 유학한 일군의 젊은 감독들이 새로운 영화를 선보였다. . 홍콩은 1970년대에 유행했던 쿵푸영화와 코미디영화의 붐이 사그러들 무렵, 전성기를 구가하던 방송산업이 흔들리면서 TV 쪽 인력들이 영화계로 유입된다. 삼중국에 등장한 새로운 세대의 공통적인 특징은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초반에 출생해, 중국, 홍콩, 타이완 각각의 현지 문화와 역사를 고스란히 체험하며 자라났고, 이전 세대와 달리 외부의 문화를 자유롭게 접했다는 점이다.  1990년대 접어들면서 타이완 뉴웨이브영화들은 국내 시장에서 활력을 잃고 정부 보조금이나 해외 자본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게 된다.

대륙의 WTO 가입과 삼중국의 심기일전(2001∼)

2001년 중국대륙은 WTO에 가입하면서, 분장제(分帳制: 상영 수익의 일정 비율을 수출한 측에 배분하는 방식)영화 수입편수를 10편에서 20편으로 확대하고, 영화관 건립과 증축에 외자 비율 49%까지 허용하는 등 영화업의 문호를 열기 시작했다. 국영영화제작소는 지역의 영화 단위들을 묶어 그룹화시켰고, 민간 자본 투자 활성화 정책은 영화계에 자본 유입을 가속화시켰다. 한류와 한국영화의 질적 수준 향상과 홍콩영화의 몰락 등은 1990년대 말부터 삼중국에 한국영화의 존재를 알릴 수 있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