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1940년대
개화기 시절에 서구문물이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에도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최초로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한 시기는 1903년 이전으로 추측되며 당시에는 영화를 활동사진으로 부르기도 했다.
최초의 영화는 1919년작 '의리적 구토' 라는 작품인데 연극과 영화의 중간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최초의 극영화는 1923년 '월화의 맹세' 라는 작품이다.
'근로의 끝에는 가난이 없다' 라는 작품은 제작이나 촬영은 일본인이 맡았으나 감독이나 배우들은 조선인들이 맡은 완벽판으로 필름이 남은 가장 오래된 한국영화이다.
두번째로 오랜된 한국영화이자 가장 오래된 발성영화인 '미몽'은 2005년 중국에서 발견되었으나 필름 상태가 좋지 않다.
광복 이전 한국 영화 필름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필름 상태가 매우 열악한 경우가 많으나 친일홍보 영화의 경우에는 일본에서 보관하여 상태가 매우 좋은 것도 있다.
1950년대
대한민국이 정부수립 된후 한국전쟁이 나면서 영화계는 침체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 한국전쟁 복구 과정에서 미국의 선진적인 영화 기술을 습득 할수 있었고 기득권이 없다시피 한 시접에서 신진 감독들이 다양한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
1950년대 한국영화 대표작으로는 '자유부인' 이 있으며 이로인해 영화가 유망 엔터테인먼트로 급부상하면서 능력있는 인재들이 많이 유입 되었다.
1955년에는 전 영화인과 관객들의 여망에 따라 국산 영화에 대한 면세조치가 취해져 이후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60년대
1960년대는 한국 영화계에 있어서 역량이 급속도로 끌어올려진 전성기 이다.
1960년대 초에 가족멜로 라는 독특한 장르가 부각되면서 이데올로기를 담은 영화 등이 상영되기도 했다.
이때 정부에서 발표한 영화법으로 인해 다소의 제약은 있었으나 덕분에 영화의 인프라가 확충되고 전반적인 질적 수준이 상향되어 소위 보따리 영화상들을 퇴출하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전쟁영화의 경우 사용된 무기 소품이나 전투신의 수준이 시대를 감안하더라도 매우 훌륭한 수준으로 당시의 할리우드 영화와도 비견될 정도 였다.이유는 한국군이 실제 사용하던 군용장비.실탄 등을 동원하여 촬영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 대표작으로는 '하녀','미워도 다시 한번'이 있다.
1970년대
1970년대에는 텔레비전이 전국적으로 보급되면서 영화관에 가지 않아도 영화를 볼 수 있는 환경이 조정 된것도 있지만 외국 영화가 급속히 영화시장 점유율이 늘어남에 의해 1960년대에 비하면 인기가 사그러들게 되었다.
이시기에 외국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비슷하게 영화를 제작하며 전제적인 질적 저하가 발생하였으며 1970년대 10월 유신을 기점으로 사회문화적으로 표현의 자유가 제한된 것도 원인 중 하나로 볼수 있다.
1970년대 중반까지 흑백+ 후시 녹음방식 이었으나 이후 컬러+동시녹음방식으로 변경되기 시작했다.
한국영화 최초의 동시녹음 영화로는 '심봤다' 라는 작품이 있다.
1970년초에는 청년영화 와 액션영화 가 주를 이루었으며 당시의 영화들은 느와르적 요소들이 많이 포함되어있다.
1970년대 중반에는 하이틴물 과 호스티스물 이 주를 이루었으며 산업화에 뒤따른 향락산업의 발전으로 사회적 관심사가 된 술집 작부를 다룬 호스티스물은 처음에는 여성의 비극을 극대화한 신파극적 성격과 사회비판적 성격에서 점점 유명 여배우 벗기기 시리즈로 퇴보되었다.
1980년대
1970년대부터 차츰 식어가던 한국 영화계는 3S정책이라 일컬어지는 정부 차원의 시장 왜곡 및 홍콩 영화, 헐리우드 영화 등 외화 수입의 증가에 따라 대중은 더더욱 국산 영화를 외면하게 되어 암흑의 시기로 빠져들었다.
1980년대 한국에서 가장 많이 성행한 장르는 에로 영화이다. 이때 나온 작품이 '애마부인','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등이 있다.
1987년 이후에는 민주화가 이루어지며 이전까지는 금기시되었던 사회문제들을 다룬 영화들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주로 다루었던 장르로는 독립영화, 다큐멘터리 이며 대표작으로는 '상계동 올림픽','오!꿈의나라' 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