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배경 및 개념
영화의 역사는 1895년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제작한 단편 영화 모음집 '시네마토그래프'으로 최초의 상업영화이다. 매체로서는 오락수단으로 시작했으나 교육,선전,과학 연구의 목적으로 확대되었으며 내용으로서는 가벼운 희극으로 시작되었으나 통속드라마,강연교재 등의 요소가 뒤섞이면서 빠르게 예술적인 차별성을 갖추게 되었다.
영화 역사란 영화의 발전을 기록하는 영화연구의 한 분야이며 역사상 한 시대에 실제로 일어난 일을 다루는 영화의 기록물이다. 영화 역사 연구란 영화의 속에 그려진 과거사를 기술하는 방법론과 기술방법과 관련된 이론이 존재하는가를 탐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영화 역사의 개념을 세계영화사로 확대해보면 세계영화사란 영화가 탄생한 이래 지금까지의 세계영화를 역사적으로 중요한 개별 영화 또는 감독, 주요 영화사적 사건 및 주요 사조, 오락,산업,예술 사이의 충돌과 조화의 과정 등을 기준으로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것으로 정의 할 수 있나 범위가 너무 방대하여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어렵다.
영화의 탄생
어두운 동굴 속에서 불빛에 비친 사물의 그림자를 봄으로써 사물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면서 눈을 통하여 본다는 인간의 신체구조 자체를 어둠상자의 원리에 비교한 생각은 오랫동안 있어 왔다. 이러한 생각은 18세기 중반에 환등의 개념으로 나타나 18세기 후반에 서는 세계 각처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나 영화가 발명되기 위해서 필요했던 사진기와 필름은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1802년에 런던의 왕립학회에 제출한 각서에서 웨지우드가 사진술의 기술과 정의를 확정했으며 1826년에 죠세프 니세포르 니엡스는 아스팔트 감광층에 영상을 고정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피사체를 태양에 노출시키는 긴시간의 과정이 필요했다. 1870년대에는 피사체를 태양에 노출시키는 긴 시간의 과정이 필요없게 되는 렌즈가 발명되었으며 1885년에는 셀룰로이드 필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영화의 발명은 1890년대에 사진에 의한 화상의 기록이나 분해사진에 의한 움직임의 재현이며, 셀룰로이드 필름에 의한 장시간의 투영 등 필요한 원리와 재료가 이 무렵에 이미 고안되어 있어서, 이것들을 짜맞추기만 하면 될 단계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영화기술의 성립(1895년~1905년) - 활동사진의 등장
뤼미에르가 대중의 일상을 다룬 리얼리즘 영화의 창시자라면, 조르주 멜리에스(Georges Méliès)는 표현주의 영화의 창시자로 볼 수 있다.
영화를 최초로 발명한 사람인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이다. 뤼미에르 형제는 돈을 받고 영화를 보여주는 행위로서의 최초의 '상업' 영화인 카메라와 영사기가 일체형인 시네마토그래프를 만들었으며 오늘날 영화와 유사한 최초의 영화로 인정받게 되었다. 뤼미에르 형제는 세계로 카메라맨들을 투입하여 영화를 찍고 배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미국, 러시아 등에서 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의 마술사였던 멜리에스는 영화계에 큰 업적을 남겼는데 그것은 바로 특수효과의 발견으로 영화를 찍다가 영사기가 멈추면서 우연히 물체가 다른 물체로 바뀌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멜리에스는 최초로 시나리오를 활용하고 하여 특수효과에 문학적, 연극적 요소들을 가미하여 내러티브를 도입한 영화를 만들었다.
토머스 엘버 에디슨도 움직이는 이미지를 촬영하는 키네토그래프와 개인 감사용 키네토스코프라는 접안 장치로 구성된 발명품을 소개했다. 에디슨은 사운드 도입과 최초 컬러 영화 탄생에 크게 기여했다.
예술로서의 영화 성장 - 필름다르 운동
프랑스의 필름다르 라는 영화사는 유명한 연극 배우들이 등장한 성공적인 연극들을 영화화한 최초의 영화사로 당대의 프랑스의 유명한 예술가들이 참가하여 여러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로마네스크식의 멜로드라마를 만들기는 했지만 이 필름 다르 운동은 영화에 풍부한 스토리를 도입했고, 본격적인 연기자를 출연하게 하는 등 공로도 많았으나 한편으론 영화를 무대의 종속물처럼 만들었다는 비판도 듣게 되었다.
필름다르는 전체 연극의 상연을 그대로 기록하기 위해 열두 번째 열 중앙에 카메라를 배치하고 연극의 배경과 배우의 ‘들여다보기’ 연기를 하나의 숏으로 촬영하였다.
무성 영화의 황금기
무성 영화의 중기라는 1910년대 중반 ~ 1920년대 후반에 걸쳐서는 세계 각국의 영화가 각자의 입장에서 영화 표현의 수법을 모색·연구하여 제재나 표현양식에서 크게 발전한 시기였다.
이태리 최초의 스펙터클 영화는 〈폼페이 최후의 날〉이며 〈쿼 바디스〉도 대단히 성공적인 영화였다. 당시 세계영화시장의 주도권은 이태리가 거머쥐었으나 얼마 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해 상실되고 할리우드가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미국의 영화감독 데이비드 그리피스는 《국가의 탄생》과 《인톨러런스》를 만들어 미국 영화사상뿐만 아니라 세계 영화사상에 불멸의 이름을 남겼다. 클로즈업이라든가 몽타주 수법 같은 것이 풍부하게 사용되면서 영화표현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나타냈다.
독일에서는 《이기주의자》(1919) 등으로 대표되는 표현주의 영화가 주목을 끌었으며 사회적 현실로부터 탈피하여 심리학적 표현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카메라 테크닉이나 조명, 무대장치, 연기 그리고 대본 등에서 혁신적인 기법을 사용했다.
무성 영화 말기에는 제1차 대전으로 유럽의 영화계가 지친 틈을 타서 단숨에 시장을 넓혀 나갔으며, 이에 따라 상업주의가 번성해져서 스타 시스템을 내세워 오락영화로 기울어 갔으며 미국 영화는 기업과 작품의 양면에서 할리우드 영화의 확립을 성취했다고 볼 수 있다.
미국 영화가 세계의 예술가를 모으고도 그들의 개성을 살리지 못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프랑스의 감각적인 작품들, 이탈리아의 스펙터클 취미, 독일의 사회파 등과 같은 특성 중에서 각 작가들에 의하여 더욱 분화된 스타일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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